괴(槐)나무는 초목의 일종이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곳에디 단(壇)을 쌓앗는가. 나는 들으니 장단(莊壇)의 은행나무는 그 유래를 나무에게 고하기 위하여 단(壇)을 쌓았고 은(殷)나라 사직(社稷)의 잣나무는 토지신을 삼았기 때문에 단을 쌓았는데 그렇다면 우리들이 괴단(槐壇)을 쌓았는 것도 어찌 그 이유가 없겠는가,
슬프다!
괴(槐)나무는 도촌(挑村) 이선생이 손수 심은 나무이다. 선생은 경태(景泰) 년간을 당하여 육신(六臣)이 순사하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뒤따라 죽어 그 의리가 당당하여 하늘을 찌를것 같은데 이러한 때를 어떻게 처신해야 되었을 것인가.
친하기로는 세조의 옛 친구이니 한(漢) 光武帝와 嚴子陵 사이와 같았으나, 벼슬은 겨우 펑시서령(平市署令)이란 미미한 위치에 있었으니 고려말 ①고야은(古冶隱) 같은 위티였다. 나아가서는 육신(六臣)과 동맹하지도 못하였고 물러나서는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순사도 못하였으니 이른바 난처하기 백이숙제(伯夷叔齊)보다 더 심하였다.이러한 환경이고 보니 벼슬을 헌 신짝같이 바리고 하늘 높이나는 기러기 처럼 나의 마음이 편한곳을 구하고자 영주의 심산 유곡으로 들어와 집이라야 달팽이 껍질 같은데서 곤궁하게 살다 죽어도 후회함이 없) 유집었으니 그 사실을 남이 알리없고 그 행적이 숨겨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청평자(靑萍子)와 같은 벗이 없었으니 뉘라서 선생의 본의(本意)를 알겠는가.
그러나 저 우뚝 솟은 괴(槐)나무는 곧 선생의 한 조각 정신이다.
선생의 뜻을 비록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괴(槐)나무는 알 수 있었고 선생의 충렬을 조정에서는 비록 기록하지 않았으나 괴(槐)나무는 기록하였을 것이다.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어서 만물이 무궁토록 계속하는 천지조화의 힘을 기다릴것 없이 오직 선생의 이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제 선생의 뜻이 알려졌고 선생의 행적이 드러났다. 치악산(雉嶽山) 제명석(題名石)이 없어지지 않았고 도계서원(道溪書院) 제수(祭需)가 풀성하니 석양의 빛을 받아 뿌리에 얽혀서 땅 속에서 감추어졌던 생명력이 어찌 기회를 놓치랴 .
움트기 시작하고 싹을틔워 지상에 돋아나게 하여 옛 광화(光華)를 되찾게 하지 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그런 이유 때문에 이같은 현상은 하늘의 뜻이요 사람의 힘으로는 되는 것이 아님을 확언한다.
단서쪽에 금성단(錦城壇)이 있으니 그 앞에 압각수(鴨脚樹)가 있는데 곧 금성대군이 거닐던 곳이다. 이미 죽은지 수백년이 지났으나 무성하게 다시 살아나 대군의 영령을 드러나게 하였으니 괴(槐)나무와 압각수(鴨脚樹)는 역시 동일한 나무인지라 누가 초목이 무지하다 하겠는가. 순흥 사람들이 이미 단을 쌓았고 지역의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함께 시가(詩歌)를 지어 선생의 행적을 널리 소개하였으니 이러한일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괴나무와 함께 싹튼 것이다.
선생의 후손인 관희(寬憙) 등이 대대로 전할 계획을 세워 성명을 책 한권에다 적고는 그것을 광감록(曠感錄)이라 하였는데 책의 서문을 부탁하기에 나 역시 선생을 추앙해 온 터수라 드디어 사양하지 않도 우선 권서(券瑞)에 한마디 써 둔다.
前 行義禁府島事 聞韶 ②金道和 謹序
∎註 ∎
① 길재(吉再) : 공민왕2(1353) ~ 세종1(1419)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요. 삼은(三隱)중의 한사람, 字 再父 號 冶隱 金烏山人
圃隱 鄭夢周의 門下 공민왕23(1383)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3년 사마감시에도 합격했다. 이무렵(李方遠)과 한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토로하며 친분이 두터웠다. 1387년 성균관 학정이되고 성균관 박사에 이르렀다.
1389년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나라가 망할것임을 알고 고향인 선산(善山)으로 돌아왔다. 1400년 세자인 이방원이 그를 벼슬로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끝내 거절했다. 문하(門下)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등 많은인품이 베출되었다.
삼은(三隱) = 고려 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두고 이르는 말.
② 김도화(金祖和) 순조25(1825) ~ 1912
조선 말기의 학자요. 의병장. 字 遠民 號 拓菴 義城人 안동(安東), 구미(龜尾) 출신으로 정제(定薺) 유치명(柳致明)의 門人 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됨.